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3세 (문단 편집)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 '''1남''' || [[흑태자 에드워드]][br]{{{-2 (Edward, The Black Prince)}}} || [[1330년]] [[6월 15일]] || [[1376년]] [[6월 8일]] || [[켄트의 조앤]][br]슬하 2남[* [[리처드 2세]] 등.] || || '''1녀''' || 베드포드 백작부인 이사벨라[br]{{{-2 (Isabella, Countess of Bedford)}}} || [[1332년]] [[6월 15일]] || [[1382년]] [[10월 5일]] || 코시 영주 앙게랑 7세[br]슬하 2녀 || || '''2녀''' || 조앤 공주[br]{{{-2 (Princess Joan)}}} || [[1333년]] [[12월 19일]] 또는[br][[1334년]] [[1월 28일]] || [[1348년]] [[9월 2일]] || || ||<|2> '''2남''' ||<|2> [[앤트워프의 라이오넬|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br]{{{-2 (Lionel of Antwerp, Duke of Clarence)}}} ||<|2> [[1338년]] [[11월 29일]] ||<|2> [[1368년]] [[10월 7일]] ||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br]슬하 1녀 || ||<#F0F8FF> 비올란테 비스콘티 || ||<|3> '''3남''' ||<|3>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br]{{{-2 (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 ||<|3> [[1340년]] [[3월 6일]] ||<|3> [[1399년]] [[2월 3일]] || 랭커스터의 블란체[br]슬하 1남 2녀[* [[랭커스터의 필리파|포르투갈의 왕비 필리파]], [[헨리 4세]] 등.] || ||<#F0F8FF> 카스티야의 콘스탄사[br]슬하 1녀 || ||<#F0F8FF> 캐서린 스윈포드[br]슬하 3남 || ||<|2> '''4남''' ||<|2>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br]{{{-2 (Edmund of Langley, Duke of York)}}} ||<|2> [[1341년]] [[6월 5일]] ||<|2> [[1402년]] [[8월 1일]] || 카스티야의 이사벨[br]슬하 2남 1녀 || ||<#F0F8FF> 조앤 홀랜드 || || '''3녀''' || 브르타뉴 공작부인 메리[br]{{{-2 (Mary, Duchess of Brittany)}}} || [[1344년]] [[10월 10일]] || [[1361년]] [[9월]] ||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 || '''4녀''' || 펨브로크 백작부인 마거릿[br]{{{-2 (Margaret, Countess of Pembroke)}}} || [[1346년]] [[7월 20일]] || [[1361년]] [[10월 1일]] 또는 [[12월 25일]] ||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 || '''5남''' || 글로스터 공작 우르스톡의 토마스[br]{{{-2 (Thomas of Urstock, Duke of Gloucester)}}} || [[1355년]] [[1월 7일]] || [[1397년]] [[9월 8일]] 또는 [[9월 9일]] || 엘리노어 드 보언[br]슬하 1남 3녀 ||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5남 4녀의 적자녀들을 낳았다.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 왕족으로 태어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게 당연시 되는 시대였고 이로 인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많은 왕족들과는 다르게, 에드워드 3세는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낳았고 성인으로 장성하고 혼인하여 후손을 남긴 아들만 해도 5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보다 먼저 병사했고, 흑태자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였던 [[리처드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어린 리처드 2세가 즉위한 틈을 타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다. 특히 3남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사실 서른살도 되기 전에 요절했고, 아들은 없고 외동딸 필리파만 있어서 그의 자손들은 이용당하고 휘둘리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5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터졌으며 이는 결국 백년전쟁 종전 후 [[장미 전쟁]]으로 표출된다.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John of Gaunt, 1340∼1399)의 후손으로 [[코난 도일]][* 곤트의 존의 15대손], [[베네딕트 컴버배치]][* 곤트의 존의 17대손]가 있다. 즉 이 둘은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859863&gid=999339&cid=1053175|32촌 관계]]인 것. --이쯤되면 그냥 남이다.--[* 실제로 7촌이 넘어가면 유전적으로도 남이라고 한다. 본관 같은 할아버지-손자뻘 항렬의 남남인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